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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원고 / 족보와 분서 사건

한문수 2009. 6. 15. 15:00

'09년 5월 30일 명지대학교 강의 요약 원고내용.

 

 

제 1장 : 족보란 무엇인가?


족보란 한혈통의 계보로서 부계를 중심으로 혈연관계를 도표식으로 나타낸 책이며

조상을 숭배하고 혈족의 단결을 도모하며 후손으로 하여금

화목의 미풍을 이루고자 함에 그 목적이 있다.

 

족보(族譜)는 시조(始祖)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 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사책이다.

 

이에 따라 옛날부터 족보는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 번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그러므로 성족 파벌과 문중가승을 분명히 하며

항렬 존비와 관련적서 등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이다.

 

족보는 멀리 중국 6조 시대(六王朝時代)에 조상의 관력과 혼인관계 등으로

우족(右族-적자의 계통 또는 명문 거족의 집안)과

관족(冠族-지체가 훌륭한 집안)을 별하려는 데서 시작되어 발전하여 내려오다가

송대에 와서 한 혈족의 역사를 모두 기록하게 되었고

전 가족을 수록하게 되는 발전을 보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족보는 세계에서 부러워 할 정도로

잘 발달된 족보로 정평이 나있으며, 계보학의 종주국으로 꼽힌다.


씨성가족보(氏姓家族譜)란? 

-가져 온 글

 

씨(氏)는 땅속에 뿌리를 내리고, 땅 위에 움트는 싹의 형상이며,

땅속은 음(陰), 땅위는 양(陽). 사람은 동물 중에 령(靈)이 있다 하여 스스로 씨라 표현하여 왔다.


성(姓)은 여(女)와 날 생(生)을 짝지어 놓은 글자이니

씨(氏)인 씨앗이 모태(母胎)에서 태어남을 뜻함이고 먼저 “씨”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이렇듯 씨(氏)가 먼저 있었고, 다음 성(姓)이 있었으니 순서대로 보면 씨성(氏姓)이 정론이다.

 

국가의 지명(地名)이 성(姓)이 된 것이 대부분이었다,

즉 나라(國), 지명(地名), 읍(邑), 향(鄕), 정(亭), 자(字), 명(名),

관명(官名), 작위(爵位), 길 흉덕(吉, 凶德), 사(事=벼슬 또는 영營),

시호(諡號), 제방(諸方), 대북(代北=북방지역),

평성(平聲),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 등에서 성(姓)이 발생했다.


가(家)자는 집 면(?)에 돼지(豕)를 조합한 글자로

본래 뜻은 돼지는 새끼를 많이 낳는다는 데서, 농경 유목민 시대의 가족 구성.

넓은 뜻으로는 8촌(寸)~10촌(寸) 이내의 혈통을 일컫는 것이 본뜻이다.


족(族)글자를 보면 모방(方:口)안에 사람인(人)이 모여 살면서

활과 화살(矢)로 외부의 침입을 방어하며 모여 사는 곳으로 국(國)과 같은 뜻이다.

족(族)은 혈육(血肉)이 모여 사는 곳을 뜻한다.


계(系)글자는 실 (사絲)이 이어져 있는 모양으로 이어진다하여

혈통(血統) 계통(系統)의 뜻도 된다.

※ 순서로 보면, 씨성(氏姓)→성족(姓族)→가계(家系)→부족(部族)

→○○부족(부락部落)→○○국(○○國)으로 변천되고 발전되었다.


보(譜) 글자는 말씀 언(言)에 어우를 병(幷)에 날 일(日)을 받쳐

그늘이 넓다는 뜻인 두루보(普)를 짝지은 글자로

혈연(血緣)이나 사회 등에 대하여 두루 밝혀 기록하는 것이라 하여

계보(系譜) 족보(族譜)등의 뜻이다.

 


* 족보에 관련된 사례 연구

 

1) 알렉스 헤일리의 ‘뿌리’와 대야발의 ‘단기고사’

.

2) 한웅 7대, 한인 18대, 단군 47대와 박재상의 ‘부도지’.


3) 치우 천황과 달마대사, 선(禪)불교의 기원


4) 타고르의 ‘동방의 등불’


5) 윌라드 리비와 동기감응(同氣感應).


6) 황제 헌원과 국내 족보 실태




제 2장 : 古代史書는 불타고 있는가 ?

 

(위 제목 원고는 3년여의 자료 추적으로 1천여 매의

원고를 작성했고, 현재 역사 교육원 강의 진행 중임)


-머릿 말

조선조가 고대사서를 수거한 목적은 무엇이었으며,

행방은 어떻게 되었고, 어떻게 처리되었을까?.

오랜 시간 아는 범위의 국내 서고를 모조리 찾아보았으나

수거된 고대사서는 단 한 권도 보이지 않았다.


수거의 이유와 사라져 버린 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본 내용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는 과정에서 온 몸을 조여야했고,

세상에 드러내야 하느냐는 부끄러움과 분노로 날밤을 세웠다.

 

조선조 500년 동안 정체(停滯)와 단절된 역사에서

이제 다시 영광으로 펼쳐 가야할 우리 역사,

그동안 잃어 버렸던 우리 민족의 올바른 역사를 다시 찾아

‘정신적 다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한 나라의 역사가 폐기되는 것은 반드시 외세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추적 과정에서 보았다.

 

이 보다는 내적으로 썩고 병든 정권과 이를 탐하는

권력 유지자들의 부하뇌동과 그들의 역사의식 결여에서 무너짐을 보았다.


“학문에는 반드시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있다.

의문을 제기하지 않으면, 얻은 지식도 확고하지 않게 된다.”

성호 이익(星湖 李益 1681-1762)의 이 말이 주는 무게가 너무 컸다.


반면교사로 삼고자 한다. 역사 지킴이들의 또 다른 추적과 지도, 편달을 바란다.

언필칭 동북공정의 논리에, 일부 강단의 논리에 이용되지 않기를 간곡히 바란다.


본 고의 전거(典據)는 한국고전번역원, 국가지식포털,

한국학지식(엠파스), 왕조실록, 규장각, 국립중앙도서관, 학계 논문집,

우리역사의 비밀, 문중 족보 및 문중 증언,

행촌문화재단 등에서 자료를 취하고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본 사서 기록을 위해 화동인물총기(話東人物叢記) 절판 본을

기커히 제공해 주신 전남대학교 출판부 박병배 과장님,

문중 족보, 자료 제공 및 복애(伏崖) 선생님의 묘소,

사당 전경 사진 게재를 허락해 주신

범대순(范大錞) 박사님께 고마운 말씀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