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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루하치의 보검(寶劍)

한문수 2008. 7. 5. 14:26

 

누루하치는 보검(寶劍)을 뽑아들고

잠든 이성량(李成樑)의 복부를 겨냥했다.

 

세 차례 찌르는 시늉을 한 뒤에 보검을 도로 제 자리에 놓았다.

이성량이 그제야 눈을 뜨고 '왜 그러느냐?' 묻자

'제가 어찌 감히 부형(父兄)의 원수를 잊을 수 있겠으며,

또 어찌 감히 길러 주신 은혜를 잊을 수 있겠습니까.

 

보검을 겨눈 것은 원수를 갚음이요,

보검을 거둔 것은 은혜를 보답함입니다.'

하였다. 이성량은 준마를 주고 떠나도록 배려했다.

 

이성량은 명나라로 귀화한 조선인으로

변경지방의 무장으로 많은 전공을 세워

영원백공(寧遠伯公)의 칭호를 받았으며,

자식들에게도 관직과 작위가 수여되어 일족의 영화를 이루었다.

 

이 말은 이규경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

'원수를 갚고 은혜를 보답한 데 대한 변증설'에 보인다.

 

임진왜란 때 원군을 끌고 조선에 온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 1549-1598)은 그의 아들이다.

 

일찍이 건주여진의 왕고(王?)가 반란,

이를 토벌하고 그 땅을 누루하치의 아버지인 타실에게 주고

건주(建州) 좌위 지휘(左衛指揮)를 삼았었다.

 

그러나 타실이 변방을 침입해 오자 성량이 섬멸하고

두 아들 누르하치와 쑤르하치[速兒哈赤]를 포로로 하여

급사(給事)로서 성량의 집 종을 삼아 아들처럼 길렀다.

이 기록은 성호사설 청 태조(淸太祖)편에 보인다.

 

그 뒤에 쑤르하치는 누르하치에게 죽었고,

누르하치는 그 무리들까지 거느려 여러 부(部)를 통합하여,

금(金)나라가 망한지 382년 만인 1616년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명을 멸망시키고 대륙을 통일했다.

1636년 국명을 청(淸)으로 바꾸었다.

누르하치가 살아있을 때는

조선과는 더 이상의 충돌은 없었다.

 

그러나 조선조는 숭명배청(崇明背淸)의

사대(事大)로 인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연이어 당하는 자충수를 두어 동족상쟁의 전란을 맞았음이다.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는 신라인 김함보의 후예였고,

이를 이은 누루하치는 한민족의 같은 부류인 여진족이었으니,

역사의 뼈아픈 기록이 아닐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