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선 사람을 만나면 부모를 본 듯하여 슬픕니다.”
라는 애절한 울부짖음이 귓가에 맴돈다.
고구려 멸망 후 1097년, 발해국 멸망 739년까지 이어온
천손민족의 후예이며, 발해국의 귀족 가문인 ‘오가(烏家)’의 족적이
조선 후기에 비로소 나타난다.
오가 상인[烏商]은 오림보의 동생으로,
그는 조선말을 약간 통하며, 가곡(歌曲)도 대강 할줄을 안다.
대개 통관들은,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포로가 된 이들의 후손들이었다.
오가 상인이 일찍이 나를 찾아 왔기에,
내가 “그대의 가계는 본래 조선인이니,
우리들을 만날 적에 친구를 만난 듯이 기쁜가?” 하니,
오가 상인이 조선말로 대답하기를,
“나는 조선 사람을 만나면 부모를 본 듯하여 슬픕니다.” 하였다.
내가 말하기를,
“당신들은 몸소 상국(上國)에 들어와 살고 있으니,
우리들처럼 적막(寂寞)하지 않을 터인데,
어찌해서 슬프다 하는가?” 하니,
오가 상인이 머리를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이 때문에 더 슬픕니다.” 하였다. 이때부터 자주 내왕하였다.
일찍이 그에게 노래를 청하여 두어 곡을 불렀는데, 악보에 대략 맞았다.
그도 나에게 거문고로 화창할 것을 청하였었다“
이 기록은 1765년 영조(英祖) 41년
계부 홍억(洪檍)의 연경사행(燕京使行)에 수원(隨員)으로 따라갔던
조선조 후기실학파(後期實學派)의 선구자인 홍대용(洪大容)이
연경의 시장에 나갔다가 상인을 만나 나눈 대화 한 토막이다.
그의 문집 담헌서(湛軒書) 외집 7권(外集 卷七)
연기(燕記) 포상(鋪商) 편에 쓴 내용이다.
1777년 3월 7일 정조조 왕조실록을 보면,
청(淸)나라의 칙사(勅使)가 왔다.
임금이 모화관(慕華館)에 나아가 칙사(勅使)를 맞이하였으며,
숭정전(崇政殿)에서 다례(茶禮)를 행하였다.
부음(訃音)을 전하러 온 칙사의 정사(正使)는
산질 대신 일등 포적공 겸 세관 좌령(散秩大臣一等褒績公兼世管佐領) 융흥(隆興)이고,
부사(副使)는 내각학사 겸 예부 시랑 홍려시 정경 공중 좌령
(內閣學士兼禮部侍郞鴻臚寺正卿公中佐領) 영신(永信)이고,
대통관(大通官)은 오임보(烏林俌)·금복귀(金福貴)·
박보수(朴寶樹)이고, 차통관(次通官)은 김동양(金東陽)이었다.
홍대용이 연경의 시장에서 만났던
조선인 오가 상인(烏家商人)의 형 오림보가 조선을 찾아 온것이다.
오림보는 이 땅에서 어떤 회한의 눈물을 흘리고 돌아갔을까.
후 기록이 보이지 않아 안타까울 따름이다.
국내에는 烏씨 성이 전무하다.
사기(史記)와 시경(詩經) 주석자들이
삼족오인 현오(玄烏)를 제비(燕)로 바꾸어 놓았 듯,
조선조가 60여 년 고려사 개수 작업을 통해
동음이자(同音異字)인 ‘오(吳)’나 ‘연(燕)’으로 흡수 시킨 것은 아닐까?.
개연성은 있으나, 아직은 연구 단계로 남겨야 할 것 같다.
-삼족오, 그 찬란한 슬픔의 역사(2) 집필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