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교육원의 주소 http://1331.co.kr/index.htm 에서
“1331”를 취해 역사적 기록과 사건을 연계해 보았다.
1. 고려 화폐의 역사
1331년 고려사절요 충혜왕(忠惠王) 조에 보면,
지금처럼 지폐를 사용하기 전 일이라
새로운 소은병(小銀甁)을 사용했다.
소은병 한 개의 가치는
오종포(五綜布) 15필(匹)에 해당하게 하였으며,
옛날에 만들어진 은병은 통용을 금하였다.
한치윤이 쓴 해동역사(海東繹史) ‘식화지(食貨志) 전화(錢貨)’에는
《고려사》에 성종 15년(996)에 비로소
철전(鐵錢)을 사용하였으나,
중도에 폐기되어 시행되지 않았다고 썼다.
1097년 숙종 2년에 이르러서 비로소 돈을 주조하였으며,
1101년 돈을 사용하는 것으로 종묘(宗廟)에 고하기는 하였으나,
이해에도 역시 은병으로 돈을 삼았다.
그 제도는 은 1근으로 우리나라 지형의 형상을 만들었는데,
세속에서는 이를 이름하여 활구(闊口)라 하였으며,
대개 동전(銅錢)과 함께 사용되었다.
그 뒤 법이 피폐해져서 동전과 은병을
모두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오종포만을 사용하여 화폐로 삼았다.
1390년 공양왕 2년에 도평의사사가
저폐(楮幣)를 제조하여 오종포와
아울러서 사용하기를 청하였으며,
1392년 4년에 이르러서는 저폐를 폐지하고
다시 동전을 사용하였다고 적었다.
2. 충혜왕 즉위, 이후 악양현(岳陽縣)에서 독살
1331년 원(元)에 가 있던 충혜왕이 돌아와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충숙왕(忠肅王)이 복위(復位)함에 따라
다시 원으로 들어가 1340년에 돌아와 복위(復位)했다.
그러나 충혜왕이 혼란한 정치를 하자
원(元) 나라는 1343년 왕을 압송, 게양(揭陽)으로 귀양보냈다.
그러나 충혜왕은 귀양가던 도중
이듬해 악양현(岳陽縣)에서 죽었는데,
독살되었다는 설도 있다.
후인들은 이를 악양(岳陽)의 욕(辱)이라 하여 경계했다.
악양현은 중국 후난 성(湖南省) 북쪽에 있는
항구 도시로 둥팅 호(洞庭湖) 동북쪽 끝에 접하여 있으며,
양쯔 강(揚子江)으로 연결된다.
웅대한 경관으로 유명하며,
두보의 시로도 널리 알려진 곳이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