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종 때의 문신이었으며, 고려 12시인 중의 한 사람으로 꼽혔던 정지상(鄭知常)은 묘청의 난에 연루되어 1135년 김부식(金富軾)에게 참살되었다 당대의 거두였던 김부식과 역학과 노장 철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정지상. 이규보가 쓴 <동국이상국집 부록 백운소설(白雲小說)>에 두 사람의 악연의 고리가 밝혀져 있어 소개한다. 일찍이 두 사람은 알력이 생겨서 서로 사이가 좋지 못했다. 세속에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지상이, 임궁(琳宮)에서 범어를 파하니 / 琳宮梵語罷 하늘 빛이 유리처럼 깨끗하이 / 天色?琉璃 라는 시구를 지은 적이 있었는데, 부식(富軾)이 그 시를 좋아한 끝에 그를 구하여 자기 시로 삼으려 하자, 지상(知常)은 끝내 들어 주지 않았다. 뒤에 지상은 부식에게 피살되어 음귀(陰鬼)가 되었다. 부식이 어느 날 봄을 두고 시를 짓기를, 버들 빛은 일천 실이 푸르고 / 柳色千絲綠 복사꽃은 일만 점이 붉구나 / 桃花萬點紅 하였더니, 갑자기 공중에서 정지상 귀신이 부식의 뺨을 치면서, “일천 실인지, 일만 점인지 누가 세어보았는냐? 왜, 버들 빛은 실실이 푸르고 / 柳色絲絲綠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 桃花點點紅 라고 하지 않는가?” 하매, 부식은 마음속으로 매우 그를 미워하였다. 뒤에 부식이 어느 절에 가서 측간에 올라 앉았더니, 정지상의 귀신이 뒤쫓아 와서 음낭을 쥐고 묻기를,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왜 낯이 붉은가?” 하자, 부식이 대답하기를, “언덕에 있는 단풍이 낯에 비쳐 붉다.” 하니, 정지상의 귀신은 음낭을 더욱 죄며, “이놈의 가죽주머니는 왜 이리 무르냐?”하자, 부식은, “네 아비 음낭은 무쇠였더냐?” 하고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다. 정지상의 귀신이 더욱 힘차게 음낭을 죄므로 부식은 결국 측간에서 죽었다 한다. 김부식(金富軾)은 고려 문종 29년 1075년에 태어나 의종 5년인 1151년에 77세의 나이로 죽었다. 당시로는 장수한 나이다. 자는 입지(立之)이고, 호는 뇌천(雷川)이다.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출정하기에 앞서 재상들과 의논하여 먼저 개경에 있던 묘청의 동조세력인 정지상(鄭知常)· 김안(金安)· 백수한(白壽翰) 등의 목을 베었다. 정지상은 서경출신으로 초명은 지원(之元)이며, 호는 남호(南湖)로 예종 9년인 1114년 과거에 급제하였다. 일찍이 정치에 깊이 간여하였고 음양비술(陰陽秘術)에도 관심이 많아 묘청(妙淸)·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삼성(三聖)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한편, 지상은 서울을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하며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유교적이고 사대적 성향이 강하였던 개경세력과 극력 대립하였다. 그 결과 서경을 거점으로 하여 묘청 등이 난을 일으키자 여기에 적극 가담하여 금나라를 정벌하자고 주장하면서 칭제건원(稱帝建元)을 하였다. 그러나 이에 맞선 개경세력의 김부식이 이끄는 토벌군에게 패하여 개경에서 참살되었다. 정지상은 정치적 인물로서 만이 아니라, 문인으로서 특히 뛰어난 시인으로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컸다. 그의 시재에 관해서는 이미 5세 때에 강 위에 뜬 해오라기를 보고 “어느 누가 흰 붓을 가지고 乙자를 강물에 썼는고(何人將白筆 乙字寫江波).”라는 시를 지었다는 일화가 야사로 전해 올 만큼 뛰어났다고 한다. 또한 김부식은 자신의 막료로서 전공을 세운 윤관(尹瓘)의 아들 윤언이(尹彦? ?∼1149)를 포상하기는 커녕 정지상과 내통하였다고 탄핵하여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로 좌천시켰다. 그 이유는 그가 이전에 칭제건원론(稱帝建元論)을 주장하였던 사건과 관련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감정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일찍이 예종 때 아버지 윤관이 왕명을 받들어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의 비문을 지었었다. 그러나 그 글이 좋지 않아 그 문도(門徒)가 은밀히 왕에게 말하여 김부식(金富軾)을 시켜 다시 짓게 하였다. 부식은 사양하지 않고 다시 지었고, 그 때문에 원한을 품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1133년 왕이 김부식에게 《주역》을 강론하고 윤언이에게 이를 묻고 논란하게 하였다. 윤언이는 《주역》에 매우 정통하였으므로 정연한 논리로 반박하여 김부식으로 하여금 대답이 궁하게 하였다. 한편 1140년 사면령이 반포되어 윤언이가 곧 중앙정계로 복귀할 전망이 보이자 정치적 보복이 두려워 세 번이나 사직상소를 올려 어렵게 왕의 허락을 받았다. 이때 왕은 사직하고 집에 있던 그에게 《삼국사기》의 편찬을 명하고, 젊은 관료 8인을 보내어 돕도록 했다. 그는 인종이 죽기 직전에 50권의 《삼국사기》를 편찬하여 바쳤다. 송나라 서긍(徐兢)은 《고려도경 高麗圖經》인물조에서 그를 “박학강지(博學强識)하여 글을 잘 짓고 고금을 잘 알아 학사의 신복을 받으니 능히 그보다 위에 설 사람이 없다.”라는 평을 하기도 하였다. 사적 감정에 치우친 일의 그르침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가져 올 수 있다는 뜻으로 교훈 삼아 볼만하다. 모쪼록 만사 수신제가(修身齊家)할 일이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破閑集, 鄭知常(梁柱東,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