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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양(陰陽)의 조화로움

한문수 2008. 8. 11. 11:52

 

음양(陰陽)의 조화로움은 세상을 풍요롭게 한다.

그러나 음양의 조화가 깨질 때

세상은 더 없이 비참한 결과를 낳게 된다.

세 가지 사건 기록을 정리해 보았다.


<제 1화> - 기생과 무오사화(戊午史禍)

 

연산조 조선을 뒤흔든 대 사건 무오사화(戊午史禍)의 단초는

기생과 놀아난 지방관의 방자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이극돈(李克墩 1435(세종 17)~1503(연산군 9))이

전라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세조비 정희왕후(貞憙王后)의

국상중임에도 불구하고 기생과 놀아났다.

 

이유원(李裕元 1814~1888)이 쓴 임하필기(林下筆記) 제24권 사필(史筆)과

유자광전(柳子光塼)에 보면, 김일손(金馹孫)이 이 사실을 사초(史草)에 기록했고,

이를 알게 된 이극돈이 고쳐달라고 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이에 이극돈은 유자광(柳子光)과 모의, 무오대옥(戊午大獄)을 일으켜

대역(大逆)으로 논죄하였고 당대의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조리 살육되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이 문제가 되어

사림(士林)들이 화를 입은 이 사건은 1498년 연산군 4년에 일어났다.

 

이 사화로 사림파의 사조(師祖) 김종직은 부관참시 당하고,

김일손, 정여창(鄭汝昌), 김굉필(金宏弼) 등은 죽거나 귀양 갔다.

조선조의 4대 사화사건 중 첫 사화로 남아 있다.


<제 2화> - 임진왜란과 기생첩

 

임진왜란은 남의 일이었다. 임금도 백성도 남의 일이었다.

자신의 안위만 찾으면 그만이라는 어그러진 평강의 원칙이

역사에 남아 후손들에게 치욕을 안겨 준 사례 또한 기생으로부터 시작된다.

 

임란이 일어났던 1592년 5월 1일 왜인들이 종묘를 불태웠다.

도성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사족(士族)들이 먼저 도망했고 백성들도 흩어져 도망갔다.

 

왜인들은 이들을 회유했고, 무뢰배들은 적에게 붙어 향도(嚮導) 노릇을 하며

못된 짓을 저지르는 자가 매우 많았다. 고자질하는 자에게는 상을 주었다.

 

서로 모여 말을 하거나 거동이 수상한 자는 모두 태워 죽였다.

동대문 밖에 해골이 산더미처럼 쌓였다고

왕조실록은 당시의 처참했던 광경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전 공조 참의였던 성세녕(成世寧)의 기생첩에게

양녀(養女)가 있었고 왜장(倭將)의 총애를 받았다.

 

성세녕은 그의 아우 성세강(成世康)과 양주(楊州)의 산중에 피난하여 있었다.

그 때 양녀의 인연으로 집으로 돌아와 그전처럼 거처하였으며,

왜인들은 그를 존대했다.

 

왕조실록은 또 국가의 녹을 먹은 문관(文官)으로서

적에게 붙은 자는 성세녕 뿐이었다고 적었다.


<제 3화> - 父.兄을 죽인 패륜아

 

음양의 조화를 빗겨 간 대표적 사례 하나.

고려 공민왕 시절 김문현(金文鉉 ?∼1388)은 형의 애첩과

절친한 친구의 처, 그리고 재상의 첩을 간통하는 등 패륜의 극치를 보였다.

 

성균좨주(成均祭酒)라는 관직에 있으면서도

이 같은 패륜을 서슴없이 저질은 그는

또 원수(元帥) 이방실(李芳實)이 피살되자,

 

그의 부하 임영화(林永和) 형제를 살해하고 가산을 빼앗기도 했다.

이에 아버지 김달상(金達祥)과 형 김군정(金君鼎)의 질책을 받자,

신돈(辛旽)을 찾아가 “신돈은 반드시 나라를 그르칠 인물이다.”

라 무고하여 부. 형을 죽였다.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를 역임하고

화의군(和義君)에 봉해졌던 아버지,

전의부령(典儀副令)을 거쳐 좌대언에 있던 형은 이처럼 허무하게 세상을 떠났다.

 

이 패륜적 사건은 1372년 신돈이 제거되자

간관들이 그의 처단을 상소하고, 또한 헌부(憲府)에서도 이를 계속 주청하자

도망하였다가 1378년(우왕 4)에 체포되어 전의현(全義縣)으로 귀양갔으며,

1388년에 이산영(伊山營)에서 교살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으며,

그 후손들에게 영향이 미쳤다.

 

문종 2년인 1452년 관직에 나아간 그의 아들과 손자,

외손까지도 금고(禁錮)시키고 영구히 벼슬길에 등용하지 말자는

중론이 1522년 중종 때까지 계속 되었다.

 

패륜아의 이 기록은 사초(史草)에 남아

오늘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왕조실록>


2008. 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