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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동파의 고려 금수론 - 2

한문수 2008. 6. 21. 10:37

 


고려 금수론을 논하고, 염장 지르기를 하던 소동파,
지난 4월 윗 제목으로 올리고 나서,
박지원(朴趾源)의 동란섭필(銅蘭涉筆)에 그 기록이 보여 대비코자 한다.

-우리나라가 동파(東坡)에게는 가장 잘못 보였던 모양이다. 고려가 송(宋)에게 서사(書史)를 구하면,

동파는 한(漢)의 동평왕(東平王 동평헌왕(東平憲王))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상소를 올려 준열하게 배척했다.

그가 항주(杭州)통판(通判)으로 있을 때, 고려의 조공 사신이 주군(州郡)의 관리를 능멸(凌蔑)하고,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먼 지방 사람들이 중국을 사모하여 오니 반드시 공손하여야 할 터인데,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하니, 인도하던 관리들이 두려워서 수그러졌다.

고려 사신은 폐백을 관리에게 보내면서 편지 끝에 날짜를 갑자(甲子)만을 썼더니,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하니, 사신은 글을 바꾸어 ‘희령(熙寧 당(唐)의 연호)’이라 쓰자,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원우(元祐) 5년(1090년) 2월 17일에 왕백호(王伯虎) 병(炳)을 만났더니 그는 말하기를,
“옛날에 추밀원(樞密院)예방(禮房)검상문자(檢詳文字)로 있을 때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황제는 이 말을 듣고 비로소 고려 사신을 불러 볼 뜻을 갖게 되었다.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하였다.

“회동제거(淮東提擧) 황실(黃實)의 말로는 고려에 사신으로 갔던 사람의 이야기로서,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이때 고려 사람들은, ‘감히 우리가 오만한 것이 아니라,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하였다.

이 두 가지 이야기는 모두 동파의 지림(志林)에 실려 있는데,

자첨(子瞻 소식의 자)은 당시 고려를 불러 사귀는 것을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기술(記述)한 것을 보건대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

그러나 당시 송(宋)의 사대부들은 유달리 고려가 중국에 향한

정성이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을 몰라 주었다.

요(遼)와 금(金)이 견제가 되어 있으므로 송을 섬기지 못한 것이

고려의 역대 조정으로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웠던 것이다.

송 나라 학자들의 서적을 얻으면 분향을 하면서

공손히 읽는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한갓 중국의 사대부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것은 족히 한심스런 일이다.

나는 왕혹정(王鵠汀)과 더불어 극히 변명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