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파는 한(漢)의 동평왕(東平王 동평헌왕(東平憲王))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상소를 올려 준열하게 배척했다. 당시 사신을 인도하는 관리들이 모두 관고(管庫 창고의 관리(管理))로서 세도를 믿고 제 맘대로 날뛰어 예절을 지키지 않았다 하여, 사람을 시켜 이르기를, 지금 보니 이렇게도 방자하니 이는 너희들이 잘못 지도한 것이라, 만일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마땅히 황제께 아뢰리라.” 동파는 이를 물리치면서, “고려가 우리 조정에 신하로 자칭하면서 연호를 쓰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받겠는가.” 그제야 체례(體禮)에 맞았다 하고 받았으니, 이것은 동파의 묘지(墓誌)에 실렸다. 비로소 고려 공안(高麗公案)을 보았는데, 처음에 장성일(張誠一)이 거란 이야기를 하면서 거란의 군막 속에 고려 사람이 있어 자기 나라 임금이 중국을 사모하고 있다는 뜻을 말하더라고 하는 말을 듣고 돌아와 이를 황제에게 아뢰었더니, 추밀사(樞密使) 이공필(李公弼)이 뜻에 맞추어 친필로 문서를 황제에게 올려 고려 사신을 부르자고 청하여, 드디어 발운사(發運使) 최극(崔極)에게 명령하여 상인을 보내어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는 최극의 그른 것을 알면서도 공필의 잘못은 모르고 있으며 장성일 같은 자는 족히 이야기할 것도 없겠다.”하였다. 보낸 선물 중에는 가짜 금은(金銀) 알이 있었는데, 고려인들은 모조리 깨뜨려 알맹이까지 쪼개 보니 사신들은 심히 불쾌하게 생각했다. 혹시 거란 사람들이 보고 진짜로 여길까봐 걱정스러워서 그러한 것이라.’고 변명했다. 이것으로 본다면, 고려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보낸 선물을 거란 사람들과 나누어 가지는지도 모를 일이다. 혹은 이 일을 상세히 알지 못하고는 말하기를,
거란이 고려가 우리에게 내통하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고, 더러는 다른 기회에 고려로써 거란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자도 있으니, 이 어찌 틀린 것이 아니랴.”하였다. 자첨(子瞻 소식의 자)은 당시 고려를 불러 사귀는 것을 실계(失計)라고 생각한 것이다. 여러 가지 기술(記述)한 것을 보건대 모두 국가를 위한 깊은 걱정이다. 정성이 적심(赤心)에서 나온 것을 몰라 주었다. 요(遼)와 금(金)이 견제가 되어 있으므로 송을 섬기지 못한 것이 고려의 역대 조정으로서는 지극히 유감스러웠던 것이다. 공손히 읽는 지극한 정성을 드러내지 못한 채, 한갓 중국의 사대부들로부터 천대를 받은 것은 족히 한심스런 일이다. 나는 왕혹정(王鵠汀)과 더불어 극히 변명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