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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례문(崇禮門)

한문수 2008. 2. 18. 10:42

 


<사진출처; 문화재정보 홈>

 

숭례문(崇禮門)


연휴 마지막 날에 불이 난 숭례문(崇禮門) 앞쪽에 비보(裨補) 용도로

파 놓았던 연못이 있었고 남지(南池)라 했으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남지는 숭례문 밖에 있는데,

연지(蓮地)라고 했다.

 

이 연못을 장원서(掌苑署)라는 부서에서 관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관악산(冠岳山)의 화기(火氣)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용도로

파 놓았던 풍수설(風水說)에 따른 한 가지 방법이다.


1198년 고려(高麗) 때에는 산천비보도감(山川裨補都監)을 두고

산천의 비보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비보라는 말은 도와서 보충(補充)해 준다는 뜻을 가진 풍수(豊水) 개념으로

숭례문 편액의 세로 글, 잡상장(雜象匠), 광화문의 해태상 등이 이에 해당한다.


화마에서 벗어난 숭례문의 편액을 놓고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필체라는 말이 대세를 이루고 있으나,

사서의 기록은 좀 다르다.


그 기록을 살펴보자.

이규경(李圭景)이 쓴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는

숭례문의 편액은 세조(世祖)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정난종(鄭蘭宗)이 쓴 것으로

‘글씨를 잘 썼기 때문에 비판(碑版)이나 종명(鐘銘)을 어명에 의해 많이 썼으니,

숭례문의 편액도 그의 글씨라는 말은 거짓이 아니다

 

그리고 그 자체(字體)를 보아도 바로 그의 서체(書體)임이 분명하다’ 라 하고,

‘국초(國初)에 걸었던 편액이 반드시 있었을 것인데,

양녕대군(讓寧大君)이 어째서 다시 썼단 말인가’ 라 했다.


또 임진왜란 때에 왜노(倭奴)들에 의해 없어졌다가

난리가 평정된 후 다시 찾아 걸게 됨으로써,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와전된 데다 괴이한 광선에 대한 설(說)까지

다시 부회(傅會)된 것이라 했다.


임하필기(林下筆記)에는

‘숭례문이란 현판은 양녕대군의 글씨라고 세상에서 전하는데,

이것은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나온 말이다’ 라 하고,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서 이긍익(李肯翊)은

‘양녕이 비록 실덕(失德)을 하여 폐함을 당하였지만

미친 체하고 방랑하는 것이 실로 태백(泰伯)과 같다’고 하였다.

 

또 ‘지금 남대문 현판인 숭례문 석 자는 그가 쓴 글씨로서,

웅장하고 뛰어남은 그의 사람됨을 상상할 수 있게 한다’고 하여

지극히 상반된 입장을 보이고 있다.

 

또한 남대문(南大門)의 표기에 대해 일제에 의한 변경이라 항변 하나

왕조실록에는 1396년 9월 (태조 5년) 8대문의 성을 쌓고 그 이름을 지었는데,

 

정동(正東)은 흥인문(興仁門)이니 속칭 동대문(東大門)이라 하고,

동남(東南)은 광희문(光熙門)이니 속칭 수구문(水口門)이라 하고,

정남(正南)은 숭례문(崇禮門)이니 속칭 남대문이라 하고,

소북(小北)은 소덕문(昭德門)이니, 속칭 서소문(西小門)이라 하고,

정서(正西)는 돈의문(敦義門)이며, 서북(西北)은 창의문(彰義門)이라 하였다.

 

(正東曰興仁門, 俗稱東大門。 東南曰光熙門, 俗稱水口門

正南曰崇禮門, 俗稱南大門

小北曰昭德門, 俗稱西小門。 正西曰敦義門, 西北曰彰義門)

 

우리나라와 같은 중국 고대 궁전의 명칭으로,

 

임하필기는 당(唐)나라는 북쪽 안에 선정전(宣政殿),

서쪽에 연영문(延英門)과 대명궁(大明宮), 정남쪽에 단봉문(丹鳳門)과 태극전(太極殿),

왼쪽에 숙장문(肅章門), 서쪽에 금호문(金虎門)과 중서성(中書省),

남쪽에 광범문(光範門)이 있었다.


금(金)나라 변경(汴京)에 있었던 궁전이 인정전(仁政殿)이고,

송(宋)나라에는 목청전(穆淸殿)이 있었다.

또 보정현(寶鼎縣)의 행궁(行宮) 전전(前殿)을 목청전(穆淸殿)이라 하였다.


진(晉)나라의 낙양(洛陽)에는 숭례문이 있었고,

남제(南齊)에도 숭례문이 있었다.

 

진(晉)나라에는 건양문(建陽門)이 있었고,

당나라에는 선인문(宣仁門)과 신무문(神武門)이 있었다.


원(元)나라의 큰 도성 동북쪽 문이 광희문(光煕門)이고,

서북쪽 문이 숙청문(肅淸門)이다.

우리나라 전궐(殿闕)과 궁문의 명칭은 모두 전대의 명칭을 피하였지만,

우연히 같은 것이 이와 같다'

고 했다.


풍수지리상 우연히 같은 것이 이와 같을 수 있겠다고 보아도

이는 중국에 대한 사대(事大)와 자기 안위를 위한 합리화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기록을 보자.

 

‘우리나라가 산을 짊어지고 바다에 둘러싸였으므로

지리(地利)는 험고(險固)한 면이 있고,

중국 제도를 이용하여 오랑캐의 풍속을 변혁시켰으니,

문물은 찬란한 아름다움을 이루었으므로

소중화(小中華)라는 칭호가 진정 당연한 것입니다’

라고 �은

 

당대의 대학자 다산 정약용(丁若鏞)과 조선 선비들이 차용한

사대주의가 낳은 산물이 아니었을까.

 

 

대상: 무너져 내리는 국보 1호(제 45회 한국보도사진전 수상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