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드나무' 그 성스러움 흥겨운 민요 가락이 한 없이 정겹습니다 그 해 경자 93년 제재 류궐(庚子九十三年 帝在柳闕) 이라 했습니다 '단제(檀帝)께서 버드나무 궁궐에 계셨다'는 기록으로 보아 궁궐 담장과 사방 연못가에 버드나무가 우거지고, 백성들은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며 풍요로움이 넘쳤음을 보여 줍니다. ‘가을 10월 명을 내려 백성들에게 칠회력을 반포하셨다.
이듬해(기원전 2228년) 봄 3월 처음으로 백성들에게 가르침을 베풀고 그 연원이 무척 오래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유조변 (柳條邊 버드나무 방책)을 쌓아 한족(漢族)들이 넘어 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이 곳에 12개의 관문을 설치하여 고조선의 신향(神鄕)을 지키려 안간힘을 썼습니다. 한족과 동화됨을 방지하기 위한 방안이기도 했습니다. 고구려의 태동지 또한 이 지역이니 한민족과 더불어 유구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지에 접미사 '질'이 붙어 '양지질'이 되었으며 '지'가 잇빨 치(齒)로 변화되어 '양치질'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양지는 일본으로 건너가 이 쑤시개의 대명사인 '요지'가 됩니다. 죽은 자의 입에 숟가락 대신 물린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수피는 유백피(柳百皮)라 하여 수렴제(收斂劑)로 약용으로 하며 가지는 진통, 마취, 이뇨에도 효과가 있고 아스피린의 원료로 알려져 있습니다. 수류관음보살입상(水柳觀音菩薩立像)은 고려 불화 중 걸작에 꼽히고 불교 용구에서는 버들이 불경함이나, 향로 등의 장식 문양으로 나타납니다. 불평을 듣고, 버드나무 가지로 이를 닦으라는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이후 부터는 승려들이 지녀야 하는 첫 번째 물건이 되었다는 기록도 보입니다. 아름다운 나무 실과, 종려가지, 무성한 가지 (레 23;40), 와 함께 기록되어 있으며, '그 땅의 종자를 취하여 옥토에 심되 수양버들 가지처럼 큰 물가에 심더니 그 것이 자라며 퍼져서 높지 아니한 포도나무가 되어 ... ' (겔 17;5 - 6)라 했습니다.
또한 ' ... 그들이 풀 가운데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사 44 ; 4)' 라 하고, ' 나의 신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내림이' 이 같다 했으니, 복음의 상징이 되겠습니다. 못이 나무에 박힐 때 흐른 신성한 피가 흐르자 포풀라는 몸을 떨면서 황송함을 표시한 뒤부터 버들은 바람이 없어도 잎을 떨고있다는 기독교의 전설이 있습니다.
'물과 가깝다' , '소용돌이 치다'는 뜻이 있습니다. 버드나무는 잘라내도 다시 돋아나고, 물가에서 물에 씻기면서도 끄덕 없이 더 잘 자라고 있어 이러한 어원을 갖게 됩니다.
조선조 4대 문장가의 한 사람이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은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그 본질이 남아 있고, (월도천휴여본질 月到千虧餘本質) 버드나무는 백 번을 꺽여도 새 가지가 올라 온다 (유경백별우신지 柳經百別又新枝)라 하여 그 끈질긴 생명력을 노래했습니다. 기품이 있어 만인의 사랑을 받는다' 했습니다.
유요(柳腰)는 여인의 호리호리한 허리를, 미인의 애교어린 몸짓을 유태(柳態)라 하고, 버들잎 같이 아름다운 눈섭을 가진 여인을 최고라 했는데 이를 유엽미(柳葉眉)라 했습니다.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고 스스로를 오류선생(五柳先生)이라 하고 버들의 아름다운 시를 남기기도 했습니다. 버드나무는 하늘님에 대한 성스러움으로, 시어(詩語)로 우리 가슴에 남아 그 뿌리를 세세토록 이어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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